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문단 편집) === 몰락: [[에드사 혁명]] === 한편 마르코스는 바닥까지 추락한 신뢰도를 형식적으로라도 회복하고 정권유지 기반을 다져 재신임을 할 목적으로, 1986년 대통령선거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1987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대통령선거를 1986년 1월로 앞당겨서 재신임을 묻는 투표를 실시할 것을 발표했다. 결국 선거는 1986년 2월 7일 치러졌는데, [[필리핀]] 야당의 통일후보 [[코라손 아키노]]와 마르코스의 대결이나 다름없었다. 선거 결과는 코라손 아키노에 대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마르코스의 승리라고 선언되었다. 마르코스 정권은 1986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 때 개표 중간 정산 때 야당 후보인 코라손 아키노의 표가 많이 나오자 개표 중지를 선언했다. 그리고는 "알고 보니 마르코스가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방송으로 대통령에 취임하려다가 국민들의 엄청난 저항이 일어났다. 필리핀 국회는 마르코스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남프렐(NAMFREL, 자유선거 국민운동본부)은 코라손 아키노의 승리를 발표했다. 이에 [[필리핀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언론이 "이 선거는 부정선거"라고 주장했고, 대규모 부정선거에 대한 폭로와 증거가 속속 드러나자 이에 분노한 필리핀 국민들이 [[코라손 아키노]]가 이끄는 반정부 운동에 합세했다. 이에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내려 국민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상황은 굉장히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의 인권탄압과 부정부패를 묵인해 온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미소화해와 냉전종결의 분위기 속에 마르코스 정권에게 등을 돌렸으며, [[필리핀군]] 수뇌부 내에서 마르코스의 부패에 불만을 품고 개혁을 도모하던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군 세력이 마르코스 정권 타도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마르코스의 제자'라는 인식까지 생길 정도로 마르코스의 최측근이었던 후안 폰세 엔릴레[* Juan Ponce Enrile, 1924~. 법학 교수 출신이었고, 마르코스가 상원의원이었을 시절부터 마르코스의 개인 법률 문제를 전담했으며,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후 1970년부터 1986년까지 필리핀의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으며(사실 1971년 8월 27일부터 1972년 1월 4일까지 상원의원 출마를 위해 잠깐 국방부 장관 자리에서 사임한 적이 있는데, 그 기간 동안 국방부 장관은 마르코스 본인이 직접 역임했다.), 마르코스의 계엄령 준비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마르코스의 퇴임 후에도 엔릴레는 한동안 국방부 장관을 계속 역임하다가 마르코스의 후임인 [[코라손 아키노]]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선동한 것이 발각되어 1986년 11월 23일에 국방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엔릴레는 처벌은 커녕 활발한 정치 활동을 이어나가 1987~1992/1995~2001/2004~2016년까지 3번이나 상원의원을 역임했으며, 1992~1995년에는 하원의원을 역임했고, 심지어 2008년부터 2013년까지는 상원의장도 역임했다. 2016년에 상원의원 임기가 끝난 후 비교적 조용히 살다가 [[2022년]] 6월 30일에 마르코스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무려 '''98세'''라는 어마어마한 고령으로 대통령 법률 고문으로 정치에 복귀하며 대통령비서실장까지 사임시킬 정도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로 엔릴레는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 24주기이던 [[2007년]] 8월 21일에 아키노 암살 혐의로 투옥된 군인 14명에 대한 사면을 검토해야 한다는 말을 남긴 바가 있으며, 심지어 [[2018년]] 9월 23일에는 마르코스 치하의 민간인 학살을 전면 부인하며 '[[https://www.mindanews.com/top-stories/2018/09/mindanawons-find-enriles-claim-of-no-massacres-under-martial-law-fiction-delusional/|'''베니그노 아키노 주니어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 필리핀 국방장관과 [[피델 라모스]] 필리핀 육군 대장이 "[[대국적으로 하십시오|각하,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이제 물러나십시오.]]"라고 하며 코라손 아키노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군대를 이끌고 대통령궁으로 진격하기까지 했다. 아키노 암살 이후 시민혁명의 물결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야당의 편에 서서 개혁을 지지하던 후안 폰세 엔릴레(Juan Ponce Enrile) 국방장관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마르코스 대통령의 퇴임을 촉구하면서, "군 통수권을 국민들이 선출한 진정한 대통령인 [[코라손 아키노]]에게 넘기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코라손 아키노를 지지하는 엔릴레 국방장관과 피델 라모스(Fidel Valdez Ramos) 부참모총장이 이끄는 개혁파 군부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마르코스는 군부개혁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미 종교계도 마르코스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마르코스 세력에 몰려 마닐라 시내 중심부에 있는 아기날도 캠프로 피신해 있는 개혁파 장교들을 구하기 위해 나선 사람은 바로 [[필리핀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는 하이메 신 [[추기경]]이었다. 인구의 80% 이상이 [[가톨릭]]을 믿는 국가인 [[필리핀]]에서 추기경의 영향력은 막강했는데, 추기경은 “여러분, 캠프 아기날도를 둘러쌉시다.”라고 하였다. [[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치는 추기경의 호소에 불과 몇 시간 만에 정부군 진압에 맞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는 캠프 주위에 시민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또한 아기날도 캠프 주변과 중심 도로인 에드사(EDSA) 거리를 [[묵주]]와 꽃을 든 시민들이 가득 메우기까지 했다. 이에 마르코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결국 [[필리핀]] 대통령 자리에서 [[사임]]하는 조건으로 1986년 2월 25일 오후 9시에 가족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마르코스를 몰아낸 일련의 [[시민 불복종 운동]] 내지 혁명은 보통 '피플 파워', '[[에드사 혁명]]'으로 칭해진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마르코스의 망명은 [[미국]] [[http://news.joins.com/article/2050222|CIA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있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처음엔 필리핀의 2.7 대선에서 마르코스가 저지른 엄청난 부정선거에 대해 "부정선거는 여야 양자에서 똑같이 저질렀으며 [[코라손 아키노]]는 마르코스에게 협력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이 발언에 대해 미국과 전 세계의 여론이 비판적이자 레이건은 "마르코스가 책임이 크다"고 꽁무니를 뺀 뒤, 필립 하비브(1920~1992)를 대통령 특사로 파견해 필리핀이 [[반미]]로 돌아서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원 출처: [[뉴스위크]] 1986년 2월 24일자 p16~19. .] 마르코스는 망명을 가는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는 호화 물품들을 챙겨갔는데, 실제로 마르코스는 망명을 가는 와중에도 7억 1,700만 달러 상당의 현금 상자 22개, 보석 상자 300개, 20만 달러 정도의 금괴, 1억 2,400만 달러 상당의 미국, 스위스, 케이맨 제도 은행에 대한 예금 전표, 그외 여러가지 사치품들을 챙겨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까지도 살아있던 마르코스의 노모는 이미 8년 전부터 심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상황이라 아들을 따라가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고, 건강이 하도 악화된 나머지 아들이 축출되었단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페르디난드는 자신을 위한 사치품들은 밥먹듯이 사고 그 돈들은 꼬박꼬박 지불한 것과 달리 어머니의 병원비는 '''[[불효자|단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결국 마르코스 어머니의 병원비는 코라손 아키노 행정부가 대신 지출하게 되었다.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1988년 5월 4일에 어머니가 고국에서 사망하자 마르코스는 장례식에 참석을 하지 못한 대신 흰 백합을 조화로 보내기는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